"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를 보고 돌아오는 길의 노트
첫 번째 영화가 나왔을 때 나는 갓 대학을 졸업한 신입이었는데, 41살에 두 번째 영화를 보면서 앤디와 실시간으로 깊은 공명을 느꼈다. 내 나이와 미디어 업계의 트렌드를 업계 내부자로서 되돌아보게 하는 순간이었다.
일은 엄청나게 매혹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잔혹한 게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잔혹함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알고 있다는 것"의 잔혹함
노력, 적성, 감각이 냉혹하게 드러난다. 미란다가 "넌 못해. 너 자신도 그걸 알고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현실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의 능력 부족을 가장 잘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다. 이 영화가 그리는 첫 번째 잔혹함은 "모르는 것"의 잔혹함이 아니라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의 잔혹함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능력 부족뿐만 아니라, 부정직함, 남을 밟고 올라서는 자아(첫 번째 영화가 집중했던 부분), 자신을 변명하는 망설이는 태도에도 적용된다. 결국, 행동하는 당사자는 알고 있다. 미란다는 내면의 자각과 외부 행동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인물로 묘사된다(파트너와 있을 때를 제외하면). 그녀는 불편한 인간적 동요 없이 "잔혹한 사람"이다. 하지만 어쩌면 잔혹한 것은 미란다가 아니라 "알고 있다는 것"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결정된다는 것"의 잔혹함
설상가상으로, 승패가 개인의 능력이나 선함과 상관없이 전적으로 당신이 서 있는 터전에 의해 결정된다는 잔혹함이 있다. 초반부에 기자들이 집단 해고되고 앤디는 분노하며 "어떻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할 수 있어!"라고 외친다. 이 영화는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나 전통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존재들"에 대한 많은 은유를 담고 있다—합성 섬유를 쓰는 2세대 상속자들, 취향 없는 벼락부자, 무례한 컨설턴트들이 그것이다. 이는 "사람의 인격과 비즈니스 성공은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화려한 면만 보여주지 않고 "먹고살려면 일해야 한다"는 현실과 "당신의 철학이나 미학과 상관없이 비즈니스의 합리성이라는 잔혹함이 밀려든다"는 현실을 그린다. 이런 리얼리즘이 좋았다. 비즈니스는 마찰과 갈등을 통해 돌아간다—"자아실현에 가득 찬" 20살의 앤디가 볼 수 없었던 세계다.
그런 게임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지만 일을 게임에 비유한다면, 가능한 태도 중 하나는 밖에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얼마나 어리석은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 포인트다. 전편의 시작에서 앤디는 냉소적인 거리를 두고 패션 잡지에서 일하는 게임을 바라본다. "나는 기자가 될 거야, 여기 영원히 있을 건 아니야", "그 옷들을 위해 수십억 엔과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게 말도 안 돼." 그녀는 거리를 유지하며 쿨한 척 게임을 했다.
하지만 중반쯤, 승부욕과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그녀는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한다. 마음을 정하고 몰입하면 게임은 분명 재미있다. "2"에서 미란다는 열기가 식은 후 "이 게임에서 내려올" 때를 가끔 생각해 온 인물로도 그려진다. 그녀의 대사 "언제 떠날 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은 단순히 "내가 내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게임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설사 하더라도 대가를 치르거나 광적으로 집착할 의무는 없다. 궁극적으로 "내가 하고 싶었기 때문에 했다"는 것이다. "넌 누군가를 구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구원받고 싶었던 거 아니야?"라는 대사가 암시하듯, 게임을 하든 말든, 그리고 얼마나 깊이 빠지든, 그 모든 것은 그저 "하고 싶었던 일을 한 것"일 뿐이다. 그 사실 자체가 다소 잔혹하다고 생각했다.
글쎄,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잔혹한 사실이다. 일에 대해, 자신에 대해 냉소적이지 말자.





